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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첫 번째 남자 리뷰 (채화영, 막장문법, 빌런서사)

by meowlab 2026. 4. 10.

첫 번째 남자 포스터


악녀 한 명이 드라마 전체를 집어삼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MBC 일일드라마 <첫 번째 남자>를 보면서 저는 그 답을 알아버렸습니다. 채화영이 욕망을 드러내는 데는 단 몇 회차면 충분했고, 그 뒤로는 리모컨을 내려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채화영 : 어디까지가 연기고 어디까지가 집착인가

오현경 배우가 연기하는 채화영은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의 전형적인 악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따라가다 보면 그 결이 꽤 다릅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등장인물이 이야기 전반에 걸쳐 변화하고 성장하거나 타락해가는 서사적 궤적이라는 개념으로 봤을 때, 채화영은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기상식에서 임신 사실이 드러나고, 마회장에게 거절당하고,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잃는 과정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그녀의 타락이 완성되는 구조입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장면은 채화영이 마회장과 통화하면서 "아들이 아니라 건강한 딸이에요"라고 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아이를 이미 잃었음에도 눈물 한 방울 없이 그 통화를 매끄럽게 마무리하는 연기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배우의 기량이 아니라면 저 장면이 저렇게 오싹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드라마 평론 분야에서는 이런 캐릭터를 마키아벨리안 빌런(Machiavellian Villain)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안이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감정적 동요를 철저히 숨기는 인물 유형을 의미합니다. 채화영이 정확히 그 정의에 부합합니다. 자신의 아이를 잃은 슬픔을 정숙희에 대한 증오로 즉각 전환하고, 그 감정을 행동의 연료로 사용하는 과정이 너무나 논리적으로 그려집니다. 욕하면서 보는 재미라는 게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오는 겁니다.

채화영의 빌런 서사에서 눈여겨볼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욕망의 시작: 드림그룹 며느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임신 이용
  • 타락의 촉매: 유산 이후 정숙희에 대한 책임 전가와 증오의 고착화
  • 행동의 정점: 쌍둥이 유괴 계획과 마회장 기망을 위한 대리 출산 위장

 

막장문법 :  왜 우리는 알면서도 보는가

막장 드라마라는 장르 문법(Genre Grammar), 즉 특정 장르가 공유하는 서사 관습과 클리셰의 체계를 따져보면, <첫 번째 남자>는 그 교과서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장르 문법이란 시청자가 해당 장르에 기대하는 서사적 패턴의 총합을 말합니다. 출생의 비밀, 쌍둥이 맞교환, 기억상실, 재벌가의 반대, 복수를 위한 신분 위장. 이 요소들이 <첫 번째 남자> 안에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드라마는 "이게 말이 돼?"라는 질문을 계속 하면서도 다음 회가 기다려지는 기묘한 상태를 만들어냅니다. 개연성의 허점을 인지하는 순간과 다음 전개를 기대하는 순간이 동시에 공존하는 거죠. 강준호가 채화영의 친아들이라는 반전이나, 쌍둥이 자매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얽혀드는 과정은 솔직히 서사적 신선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허점이 오히려 다음 회차의 '사이다' 복수 장면을 더 기다리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이 장르의 지독한 매력입니다.

한국 방송 콘텐츠 산업 전체에서 일일드라마가 차지하는 위상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일일드라마는 주5일 편성 특성상 주간 시청 점유율 계산에서 미니시리즈보다 총 시청 시간 기여도가 높은 편성 형태로 분류됩니다(출처: 방송통신위원회). 쉽게 말해 매일 저녁 7시에 고정 시청자를 유지하는 일일드라마의 흡인력은 수치로도 증명되는 셈입니다.

함은정 배우의 1인 2역은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축입니다. 정숙희와 그 쌍둥이 자매로 나뉘는 캐릭터 분기 구조는 배우에게 극단적으로 상반된 정서를 동시에 소화할 것을 요구합니다. 제가 직접 회차를 연속으로 봤을 때,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두 인물의 눈빛 차이가 눈에 띌 만큼 달라서 꽤 놀랐습니다. 미간의 힘을 빼고 들어가는 정숙희와, 어딘가 날이 선 눈매로 등장하는 또 다른 자매의 표정 연기가 확실히 구분됩니다.

 

빌런 서사 : 카타르시스 구조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드라마 서사에서 카타르시스(Catharsis)는 단순히 통쾌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카타르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관객이 극 중 인물의 고통과 공포를 대리 체험함으로써 감정적 정화와 해소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남자>는 채화영의 악행이 쌓일수록 정숙희 혹은 복수의 화신이 된 주인공이 그 악행을 뒤엎는 순간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악인의 악행이 충분히 구체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유괴, 감금, 정신병원 위장, 마회장 기망. 채화영이 저지르는 악행의 목록은 회차가 거듭될수록 구체성이 높아집니다. 그 구체성이 시청자의 분노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시키고, 그 분노가 복수 장면의 카타르시스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겁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의 드라마 장르 연구에 따르면 일일드라마의 장기 시청 유지율은 주인공과 빌런의 감정적 대립 구도가 얼마나 선명하게 유지되는가와 높은 상관관계를 보입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여기서 시청 유지율이란 특정 프로그램을 첫 회부터 일정 비율 이상 지속적으로 시청하는 고정 시청자 비율을 가리킵니다. <첫 번째 남자>는 그 구도를 매회 흔들리지 않고 유지하는 편입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 드라마가 아쉬운 지점도 분명 있습니다. 강백호(윤선우 분) 캐릭터가 지나치게 헌신적이고 정의로운 방향으로만 소비되면서, 채화영이나 정숙희에 비해 입체감이 부족합니다. 서포터 캐릭터가 평면적일수록 빌런과 주인공의 대결 구도도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점은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아쉽게 느껴집니다.

<첫 번째 남자>는 막장 드라마가 욕을 먹으면서도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이유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채화영이라는 빌런의 서사가 단순한 악인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욕망과 상실이 뒤섞인 감정의 궤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 이 드라마를 단순한 자극적 콘텐츠 이상으로 만듭니다. 막장의 문법 위에 구축된 감정의 밀도가 이 정도라면, 매주 월화수목 저녁 7시를 비워둘 이유는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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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7UHhUQuQ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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