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널A·티빙 드라마 '허수아비'를 틀었을 때 그냥 무난한 형사물이겠거니 했는데, 첫 화 취조 장면에서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1980년대 공권력이 무고한 사람을 어떻게 짓이기는지를 이렇게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 최근에 있었나 싶어, 예고편 시청 내내 리모컨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 시청 채널 : 채널A , 티빙
🕙 편성 시간 : 4/20 [월] 첫 방송 | 매주 [월, 화] 밤 10시
🌞 등장 인물 : 강태주(박해수), 차시영(이희준), 서지원(곽선영)
80년대 : 죄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만드는 시스템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건 80년대 취조실입니다. 살인 용의자로 끌려온 이성진은 스타킹 절도 전과 하나 있는 잡범일 뿐인데, 담당 검사 차시형은 그 취미 하나를 빌미로 삼아 범인의 틀 안에 그를 억지로 구겨 넣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가장 섬뜩했던 건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자백 강요(coerced confession)가 이뤄지는 방식이었습니다. 자백 강요란 수사기관이 피의자에게 심리적·물리적 압박을 가해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범행을 인정하는 진술을 받아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차시형은 "지금 자백하면 5년 안에 나오게 해 준다"는 회유와 "끝내 버티면 평생 썩는다"는 협박을 교차하며 이성진의 의지를 무너뜨립니다.
노모를 홀로 모시는 이성진은 결국 "제가 죽였어요"라는 말을 입 밖에 냅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는 동안 손에 땀이 날 정도로 답답했던 이유는, 이게 드라마적 과장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한국 사법 역사에서 허위 자백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사건 수사 과정의 적법성과 인권 보호를 다룬 국가인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출처: 국가인권위원회), 수사 단계에서의 심리적 강압은 허위 자백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드라마는 그 교과서적 사례를 1980년대라는 배경 안에서 아주 정직하게 재현하고 있었습니다.
더 화가 났던 건 차시형의 동기입니다. 그는 범인을 잡고 싶은 게 아니라, 미제 사건(未濟事件,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사건)을 더 이상 쌓아두지 않으려는 실적 관리 심리로 움직입니다. 진실보다 커리어가 우선인 사람이 수사권을 쥐고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 드라마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보여줍니다.
공권력 : 그늘 속에서 혼자 진실을 쫓는 형사
직접 겪어보니, 이런 류의 드라마에서 주인공 형사가 조직의 눈치를 보며 어중간하게 타협하는 장면이 나오면 극의 긴장이 급격히 빠지더군요. 그런데 '허수아비'의 강태주는 달랐습니다. 경찰국장 조카를 현행범으로 잡아넣다가 고향으로 쫓겨나면서도, 그 태도 하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성으로 내려온 덕분에 연쇄 살인(serial murder) 사건의 단서를 발견합니다. 연쇄 살인이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 명 이상의 피해자를 별개의 사건으로 살해하는 범죄 유형을 뜻하며, FBI 행동분석팀의 분류 기준으로도 널리 쓰이는 개념입니다.
태주가 발견한 공통점은 단순했지만 결정적이었습니다. 피해자의 옷가지나 소지품을 이용해 결박하고 목을 졸라 살해하는 수법, 야간 귀가 중인 여성을 표적으로 삼는 패턴, 그리고 허수아비로 위장해 숨어 있다가 피해자가 혼자가 되는 순간 덮치는 방식. 이 세 가지를 꿰뚫어 보는 장면에서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다 싶었습니다. 수법 분석 장면이 흔히 빠지는 "주인공만 천재적으로 알아채는" 작위성 없이, 관객도 같이 추리를 따라갈 수 있게 증거를 하나씩 쌓아가며 결론을 내리더군요.
그 과정에서 태주가 사용하는 방법론이 바로 범죄 프로파일링(criminal profiling)입니다. 범죄 프로파일링이란 범인의 행동 패턴, 범행 수법, 현장 흔적을 분석해 범인의 심리적·사회적 특성을 추론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30년 후 태주가 대학 강단에 서면서도 진범 이형호의 가짜 기싸움을 단번에 꿰뚫는 건, 수십 년간 범인 한 명을 연구해 온 프로파일러로서의 축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묵직한 내공이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장면이 꽤 여러 곳 있었습니다.
드라마가 제시하는 허수아비 범인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야간 외출 중인 여성을 단독 표적으로 삼는다.
- 허수아비나 정지된 사물처럼 위장해 주변의 경계를 무력화한다.
- 피해자의 스카프, 보자기, 스타킹 등 본인 소지품을 흉기로 전용한다.
- 피해자의 가방을 가져가 개인 정보를 확보해 신고를 억제한다.
이 네 가지 패턴이 일관되게 유지되는 덕분에, 태주가 연쇄 살인임을 주장하는 근거가 허술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실제 범죄 분석 보고서를 읽는 것처럼 납득이 됐습니다. 범죄심리학(criminological psychology) 관점에서도, 피해자의 물품을 이용하는 행위는 범인이 피해자에 대한 통제 욕구와 기념물 수집 심리를 동시에 드러낸다고 해석됩니다. 범죄심리학이란 범행 동기, 범인의 성격 구조, 피해자 선택 기준 등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학문 분야를 가리킵니다. 드라마가 이 부분을 대사 한 줄 없이 행동 묘사만으로 전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묵직한 메시지 : 그러나 남은 아쉬움
그때 느낀 건, 이 드라마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연쇄 살인보다 공권력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차시형이 무고한 이성진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장면과, 30년 뒤 이형호가 자신의 루틴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접견 시간조차 자기 편의에 맞게 조율하는 장면이 묘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진실보다 통제를 우선시하는 구조는, 검사실이든 교도소 접견실이든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라마는 시간의 흐름으로 보여줍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악역들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그려집니다. 차시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적 괴물이고, 그 주변 인물들도 그의 부속품처럼 기능합니다. 실제 세계의 부패한 공권력은 이보다 훨씬 정교하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움직이는데, 드라마는 그 내면의 갈등을 충분히 파고들지 않아 중반 이후 악역의 새로운 면이 보이지 않는 평탄함이 생겼습니다. 입체적인 악역이 없으면 서사의 긴장은 결국 상황이 만드는 충격에만 의존하게 되는데, 이 드라마가 정확히 그 함정에 부분적으로 빠졌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의로운 시스템 안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이 드라마만큼 불편하게 들이밀었던 작품이 최근 기억에 없습니다. 한국 형사 사법 제도의 허위 자백 문제와 인권 이슈를 다룬 법무부의 사법 개혁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출처: 법무부), 수사 과정에서의 자백 의존도를 낮추는 구조적 개선은 지금도 진행 중인 과제입니다. 드라마가 허구이면서도 현실의 문제의식과 이렇게 맞닿아 있을 때, 그 불편함은 오히려 보는 이유가 됩니다.
채널A와 티빙에서 월화 밤 10시에 방영 중인 '허수아비'는, 묵직한 사회 고발 드라마를 찾는 분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악역이 너무 깔끔하게 설계됐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한 시대의 공권력이 어떻게 진실을 짓밟았는지를 이토록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는 흔하지 않습니다. 다음 화가 나오면 망설임 없이 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고 나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험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분께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