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에서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아본 적 있으신가요. 분위기가 싸해질까봐,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까봐. 저도 그런 상황을 꽤 오래 견뎌왔습니다. 그러다 드라마 <런 온>에서 오미주가 술 취한 교수에게 "사과하세요"라고 내뱉는 장면을 보고, 오랫동안 눌려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습니다. 그 한마디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 오픈 : 2020. 12. 16
🕙 편성 : TVING, 넷플릭스 · 16부작
🔗 장르 : 드라마
🌞 출연진 : 임시완, 신세경, 수영, 강태오, 이봉련, 이정하
공감과 소통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주정을 부릴 때 그냥 웃어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게 생각보다 사람을 오래 갉아먹는다고 봅니다. <런 온>의 번역가 오미주는 술에 취해 차별적 발언을 쏟아내는 황 교수에게 직접 사과를 요구합니다. 머리에 물을 붓고, 목소리를 높이고, 끝내 가방을 들고 자리를 뜨는 그 일련의 장면이 지금 이 시대의 MZ세대 정서를 아주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런 종류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는 드라마를 보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카타르시스란 억압된 감정이 극적인 상황을 통해 일시에 해소되는 심리적 정화 현상을 말합니다. 제가 간호사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른바 '태움 문화'라고 불리는 선배 간호사의 가혹 행위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줄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당한 관행에 정면으로 "이건 잘못됐다"고 말하는 세대가 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습니다. 실제로 한국간호사협회도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실태 조사를 꾸준히 진행하며 변화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오미주의 그 장면이 그래서 더 통쾌하게 느껴졌습니다.
<런 온>의 핵심은 로맨스보다 소통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거리 육상 국가대표 기선겸과 영화 번역가 오미주는 말 그대로 다른 언어를 씁니다. 선겸은 대화의 맥락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자신만의 명확한 언어 체계를 가진 인물입니다. 미주가 그 언어를 번역해주는 구조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합니다.
그때 느낀 건, 두 사람의 대화가 단순히 귀엽고 엉뚱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서로의 언어 체계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선겸이 "그쪽 라이터 진짜 미친놈이요, 미친놈 아니고 기선겸이라고 합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이나, 미주가 아무 설명 없이 "고마워요, 무슨 일이냐고 안 물어서"라고 말하는 장면들은 두 사람의 소통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 동시에 얼마나 잘 맞는지를 동시에 보여줬습니다.
이 드라마가 기댄 서사적 장치는 내러티브 심리학에서 말하는 '언어 공동체'의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언어 공동체란 같은 언어적 규칙과 맥락을 공유하는 집단을 뜻하는데, 선겸과 미주는 서로 다른 언어 공동체에서 온 두 사람이 상대의 방식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욕심 없이, 그냥 나란히 달리겠다는 태도가 지금의 연애 관계에서 가장 건강한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성장 : 달리기와 번역이 만드는 각자의 서사
선겸이 달리기를 선택한 이유는 처음부터 영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어깨 부상으로 창던지기를 그만둬야 했을 때,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따라 그냥 뛰기 시작한 게 달리기의 출발이었습니다. 미주가 번역을 시작한 것도 비슷합니다. 극장에서 처음 들은 영화 대사 하나가 위로가 됐고, "이렇게 말과 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지금의 직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직접 이 드라마를 보면서 두 사람의 성장 궤적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고 느꼈습니다.
- 기선겸: 아버지의 기대와 체육계의 부조리 사이에서 자기 원칙을 지키는 법을 배움
- 오미주: 부당한 요구에 맞서면서도 자신의 전문성과 자존감을 지켜내는 법을 익힘
- 우식: 침묵을 강요받던 피해자가 선겸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줌
이 세 인물의 성장이 각각 독립적으로 그려지면서도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구성이 좋았습니다. 특히 선겸이 우식에게 "걱정 같은 건 하지 마. 그건 가해자가 하는 거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체육계 내 위계적 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피해자를 소비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태도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라마 속 선겸의 이야기는 실제 스포츠계 인권 문제와도 겹쳐 보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스포츠 분야 인권 실태 조사에 따르면, 훈련 과정에서 신체적 폭력이나 언어적 폭력을 경험한 선수 비율이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그 현실을 드라마가 이렇게 솔직하게 끌어왔다는 점에서, 단순한 로맨스물 이상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아쉬움 : 정적인 호흡이 서사 탄력을 늦추는 구간들
이 드라마에서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방식이 지나치게 우아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미주가 보호 종료 아동이라는 설정은 충분히 묵직한 배경인데, 그 아픔이 표면에 길게 드러나지 않고 빠르게 봉합되는 구간이 있었습니다. <나의 아저씨>가 인물의 상처를 오래, 깊게, 불편할 만큼 들여다봤던 것에 비하면 이 작품은 세련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다소 빠르게 정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서브 커플인 서단아와 이영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유한 여성과 가난한 청년이라는 설정 자체는 신선하지 않고, 두 사람의 서사가 주인공 커플에 비해 충분히 깊이 다뤄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제가 직접 16화를 정주행하면서 느낀 건, 서브 커플의 에피소드가 나올 때마다 주 서사의 호흡이 끊기는 감각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빠른 갈등 전개와 폭발적인 감정 해소에 익숙해진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의 속도가 느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게 결점이라기보다는, 이 드라마가 지향하는 관계 맺음의 방식이 원래 그 속도라는 생각도 듭니다. 억지로 달리지 않고, 각자의 페이스로 나란히 가는 것. 그게 <런 온>이 말하고 싶었던 전부이기도 하니까요.
결국 이 드라마는 화끈한 전개를 원하는 분보다 대화와 관계의 결을 음미하고 싶은 분에게 맞는 작품입니다. 저처럼 직장에서 하고 싶은 말을 삼켜본 경험이 있다면, 오미주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그 장면에서 조용히 손이 올라갈 겁니다. 연출의 완성도를 따지기 전에 먼저 그 감각을 느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