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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작 매혹된 자들 (바둑, 복수, 권력)

by meowlab 2026. 5. 12.

세작, 매혹된 자들


병자호란의 치욕이 채 가시지 않은 조선 궁궐에서, 임금을 죽이려는 세작과 그 세작을 끌어당기는 임금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처음 이 드라마를 틀었을 때 "바둑으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설정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제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 오픈 : 2024. 01. 21

🕙 편성 : 넷플릭스,TVING · 16부작

🔗 장르 : 사극

🌞 출연진 : 조정석, 신세경, 이신영, 박예영, 손현주

 

바둑 : 말 대신 돌로 나누는 심리전

이 드라마에서 바둑은 단순한 소재가 아닙니다. 인물들이 직접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과 의도를 돌 하나에 담아 전달하는 핵심 서사 장치로 기능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바로 희수와 이인이 빗속에서 처음 내기 바둑을 두는 대목이었는데, 대사 한 마디 없이 돌의 배치만으로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지더군요.

여기서 포석이라는 바둑 용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포석이란 바둑 초반에 집을 만들 기반을 설계하는 전략적 돌 배치를 의미하는데, 이인이 세작을 끌어들이고 종환을 안심시키면서 3년에 걸쳐 판을 짜는 과정이 바로 이 포석 개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정치 권력 다툼이 이렇게 바둑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번역될 수 있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습니다.

장생이라는 용어도 결정적인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장생이란 같은 형세가 반복되어 승부를 낼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희수와 청나라 사신의 대국이 무승부로 끝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쪽도 완전히 이기거나 질 수 없는 운명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전문 용어들이 극의 흐름 안에 녹아드는 방식이 자연스러워서, 바둑을 전혀 모르는 시청자도 맥락으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사극에서 특정 소재를 중심 문법으로 사용할 때 자칫 억지스러워지기 쉬운데, 이 드라마는 그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바둑이라는 틀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바둑은 한국 고유의 전통 두뇌 경기로서 조선 궁중에서도 실제로 즐겨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시대 고증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복수 :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딜레마

이 드라마에서 가장 불편하면서도 가장 몰입되는 구간은 희수가 이인에 대한 복수심과 연모 사이에서 흔들리는 부분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원수를 사랑한다는 설정이 너무 클리셰 아닌가" 싶었는데, 막상 드라마가 그 갈등을 풀어내는 방식은 예상보다 훨씬 치밀했습니다.

희수는 단순히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인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대령이라는 자리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면서도, 그가 진짜로 무엇을 위해 용상에 올랐는지를 서서히 파악해 나갑니다. 여기서 세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세작이란 적의 내부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는 간첩을 뜻하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단순한 직책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물에게 적용되는 존재론적 메타포로 확장됩니다.

이인 역시 용상이라는 자리를 찬탈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진짜 자신을 감춘 채 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종류의 세작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유형의 인물 설계는 대개 후반부에서 억지스럽게 봉합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이인이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희수의 선택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그 함정을 피했습니다.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이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중반부에서 종환을 중심으로 한 권력 투쟁이 지나치게 전형적인 사극 악역의 문법을 따르면서 긴장감이 다소 늘어진 구간이 있었습니다. 특히 현보라는 인물은 매 장면에서 같은 탐욕을 반복해서 보여주다 보니, 개연성보다는 서사를 끌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장르적으로 본다면 캐릭터 아크, 즉 인물이 경험을 통해 변화하는 궤적 면에서 주연과 조연 사이의 온도 차이가 꽤 있는 편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사극 장르의 시청 시간이 전년 대비 22% 증가했는데, 그 배경에는 단순한 역사물이 아닌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된 심리극 사극의 성장이 자리한다고 분석합니다. 세작이 정확히 그 흐름 위에 있는 작품입니다.

권력 : 용상에 오른 자의 고독이 남기는 것

이 드라마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장면은 이인이 종환에게 "임금에겐 신하와 정적만 있을 뿐 친구는 없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그 말을 뱉고 나서 희수를 외면하는 장면인데, 이게 단순한 냉혹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이라는 것을 이후 서사가 천천히 드러냅니다.

이 드라마에서 권력의 핵심 구조는 이간계로 설명됩니다. 이간계란 상대방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려 갈등을 조장하는 전략을 의미하는데, 예친왕이 조선 왕실을 흔들기 위해 이인과 이선 형제 사이를 조종하는 방식이 그 전형입니다. 제가 직접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것은, 이 이간계가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비극성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정석이 연기한 이인은 권력을 욕망하면서도 그 권력 때문에 파괴되는 인간의 역설을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했습니다. 형에게 "나는 너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을 듣는 장면에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청하는 연기는, 감정을 내폭시키는 방식으로 훨씬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이 시청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권력을 얻기 위해 치른 대가를 어느 시점에 직면해야 하는가
  • 복수와 연모는 같은 상대를 향할 수 있는가
  • 진심은 거짓말로 쌓아 올린 관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

이 세 질문에 대해 드라마는 끝까지 쉬운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은 바둑이라는 정적인 소재를 통해 권력과 복수, 연모라는 동적인 감정을 치밀하게 설계한 작품입니다. 사극 장르가 익숙하다면 중반부의 느린 호흡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후반부에 수읽기가 하나씩 맞아떨어지는 구조를 보면 그 느린 페이스가 계산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넷플릭스와 티빙에서 볼 수 있으니, 한 화만 보고 판단을 미루지 마시고 최소 4화까지는 지켜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PyDmDYSXg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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