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는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심지어 남자배우의 실제 경험담이라는 사실에 충격 받았습니다. 작가 리처드 가드가 직접 겪은 스토킹 피해를 드라마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보기 시작했는데, 단순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가 아니라, 인간의 결핍과 외로움이 만들어내는 파멸적인 관계를 이토록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작품은 쉽게 만나기 어렵습니다.
📺 오픈 : 2024. 04. 11
🕙 편성 : 넷플릭스 · 7부작
🔗 장르 : 드라마 · 19세 이상
🌞 출연진 : 리처드 개드, 제시카 거닝, 나바 마우, 톰 굿맨힐
뒤틀린 연민
베이비 레인디어의 핵심은 스토킹 범죄 자체보다, 왜 주인공 도니가 6개월이나 신고를 미뤘는가에 있다고 봅니다. 스토킹을 당하면서도 신고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그 답이 훨씬 복잡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도니는 꿈을 이루지 못한 실패한 코미디언입니다. 바에서 공짜 차를 건넨 것이 발단이 되어 마사라는 여성과 엮이는데, 마사는 처음부터 위험 신호를 보냈음에도 도니는 그녀의 맹목적인 애정에서 일종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트라우마 본딩(Trauma Bonding)이라는 심리 개념이 작동합니다. 트라우마 본딩이란 학대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강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현상으로, 피해자가 관계를 끊지 못하는 가장 흔한 심리적 원인 중 하나입니다.
제가 직접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소름이 돋았던 장면은, 도니가 마사를 피하면서도 추운 밖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연민을 끊어내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면을 단순히 개연성 부족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게 이 드라마의 가장 정직한 지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건 도니의 과거였습니다. 유명 작가 대리언에게 성적 착취를 당한 경험이 도니의 자존감을 철저히 무너뜨렸고, 그 공허함이 마사의 집착을 받아들이는 토양이 됩니다. 이처럼 과거의 성적 트라우마(Sexual Trauma)가 이후의 관계 패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심리학에서도 주목하는 부분입니다. 성적 트라우마란 성폭력이나 성적 착취로 인한 심리적 상처로, 자존감 저하, 관계 회피 또는 역설적인 관계 집착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폭력 피해자의 상당수가 피해 이후 자기 비난과 수치심을 경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출처: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베이비 레인디어가 보여주는 도니의 심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꿈 실패로 인한 자존감 결핍
- 대리언에 의한 성적 착취와 트라우마 형성
- 트라우마 본딩으로 마사의 집착을 수용
- 자기혐오와 피해 사실 은폐의 악순환
- 신고를 통해 비로소 현실을 직면하는 과정
트라우마와 스토킹
스토킹이라고 하면 낯선 사람에 의한 일방적 추적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 스토킹 범죄의 상당 부분은 이처럼 어떤 형태의 관계성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이 드라마는 정확히 짚어냅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국내 스토킹 범죄의 절반 이상이 전 연인, 지인, 일면식이 있는 관계에서 발생합니다(출처: 경찰청). 마사와 도니의 관계도 처음에는 바의 손님과 바텐더라는 접점에서 시작됩니다.
마사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위험한 스토커로 봐야 한다는 시각과, 가정환경과 사회적 고립이 만들어낸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시각이 공존합니다. 저는 두 시각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쪽이든 그녀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선을 긋습니다.
여기서 집착 애착(Anxious Attachment)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집착 애착이란 어린 시절 불안정한 양육 환경으로 인해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거절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애착 유형으로, 성인이 된 후에도 관계에서 강박적인 집착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사가 순록 인형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드라마 후반부의 설정은 이 심리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쉬운 점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아쉬웠던 점은, 트라우마 묘사가 지나치게 반복적이고 노골적이라는 부분이었습니다. 도니가 대리언에게 당하는 장면들은 심리적 현실감을 위한 연출이라는 건 알겠는데, 시청자에게 요구하는 감정적 소모의 강도가 상당합니다. 그럼에도 이 불편함이야말로 작품이 의도한 것이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연출 방식, 즉 과장 없이 현실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이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반부에서 도니가 공개 코미디 공연 무대에서 자신의 경험을 풀어내는 장면은, 고백과 치유라는 서사가 어떻게 예술과 만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코미디언으로서의 실패와 인간으로서의 상처를 동시에 끌어안는 그 장면을 보며 제가 직접 느꼈던 건, 이 드라마가 결국 자기 자신을 어떻게 용서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피해자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가해자를 악마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 지점이 불편하면서도 이 작품을 쉽게 잊히지 않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스토킹 피해나 성폭력 트라우마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즐겨 보신다면, 그리고 불편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 이야기에 끌리신다면 반드시 보실 것을 권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전 7부작으로 구성된 미니시리즈니 시간 부담도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