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백하자면, 저는 박정민 배우를 오랫동안 '웃긴 역할 잘하는 배우'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화 예고편을 처음 봤을 때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극장을 나오면서 제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 "박정민이 이런 배우였어?"였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 영화였습니다.
첩보 영화로서의 완성도
미장센과 액션이 쌓아올린 것들
휴민트는 제목 그대로 휴민트(HUMINT)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여기서 휴민트(HUMINT)란 Human Intelligence의 줄임말로, 기술 장비가 아닌 사람을 통해 수집하는 인적 정보를 의미합니다. 드론이나 위성 감청이 아니라, 직접 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으면서 정보를 빼내는 방식이죠. 이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가 단순한 총격전 영화가 아님을 예고합니다.
제가 직접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건 비주얼의 온도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현지 로케이션 촬영 덕분에 화면 너머로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영화 용어로 미장센(Mise-en-scène)이라 부르는 이 요소, 즉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구성 요소들이 '차갑고 낯선 이국의 도시'라는 정서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세트가 아니라 그 도시의 실제 공기를 담아낸 결과물이라는 게 화면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액션 연출도 류승완 감독 특유의 타격감이 살아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총기를 포기하고 총을 뒤집어 잡는 장면에서 '이 감독은 액션 신 하나하나를 얼마나 고심해서 설계했을까' 싶었습니다. 그냥 쏘고 달리는 게 아니라, 공간과 상황과 캐릭터의 심리가 맞물리는 지점에서 액션이 터집니다. 이런 부분이 기존 한국 액션 영화와 결이 다른 이유라고 봅니다.
영화의 서사는 남한 국정원 블랙요원 조 과장과 북한 국가보위성 요원 박건,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정보원 최선화를 중심으로 굴러갑니다. 여기서 블랙요원이란 공식적으로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채 해외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비공개 정보 요원을 의미합니다. 공식 외교 채널 밖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본국이 쉽게 나설 수 없는 구조죠. 이 설정이 후반부의 냉정한 본부 명령과 맞물리면서 극의 긴장감을 높입니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고 느낀 포인트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블라디보스토크 현지 촬영으로 완성한 클래식하고 차가운 시각적 톤
- 첩보전의 핵심인 감시와 역감시 구도를 치밀하게 설계한 시나리오 구조
- 조인성, 박정민, 박해준, 신세경의 앙상블이 서로 견제하며 쌓아가는 서사
- 베를린 세계관과 공유되는 지점으로 팬들에게 보너스 감상 포인트 제공
한국 첩보 영화 장르의 흐름을 보면, 2013년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 이후 이 장르의 수준이 한 단계 올랐다는 평가가 많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이번 휴민트 역시 그 연장선에서 장르의 문법을 한 번 더 갱신하려는 시도가 느껴졌습니다.
박정민
예상 밖이었습니다. 박정민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은 몰랐거든요. 그가 연기한 박건은 북한 국가보위성(국가보위부) 요원으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냉철한 원칙주의자입니다. 국가보위성이란 북한의 정보·보안 기관으로, 체제 수호와 주민 감시를 담당하는 조직입니다. 우리로 치면 국정원과 경찰 기능을 합쳐놓은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관이죠. 그 요원 역할을 박정민이 연기한다는 게 처음에는 솔직히 상상이 잘 안 됐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제 의심은 5분도 안 돼 사라졌습니다. 기존의 재기발랄한 이미지를 완전히 내려놓고, 차가운 눈빛과 절제된 동작만으로 공간을 압도하는 박정민의 모습은 정말로 낯선 배우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치성과의 심리전 장면에서 보여주는 기 싸움, 그리고 최선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 딱 한 번 흔들리는 눈빛의 타이밍 조절은 연기 내공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아쉬운 점
제가 직접 보면서 아쉬웠던 부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중반부 이후 복잡한 이해관계와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구간에서 서사의 흐름이 다소 빡빡해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첩보물 특성상 정보량 자체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관객이 인물 관계도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감정선에도 집중해야 하는 구간이 겹치면서 피로감이 생기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연 캐릭터들이 조금 소모적으로 쓰였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앙상블 영화에서 조연이 단순한 장치로만 기능할 때 이야기의 감동이 반감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일부 서브 플롯이 메인 서사와 완벽하게 맞물리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살짝 있었습니다. 인물들의 내면 고뇌가 조금 더 깊게 다뤄졌더라면 비주얼과 액션의 쾌감이 감동으로까지 이어졌을 텐데, 그 부분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으로 류승완 감독 작품의 누적 관객은 꾸준히 300만 이상을 기록해왔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휴민트가 그 흐름을 이어갈 만한 완성도인가 하는 질문에, 저는 "그렇다"고 답하겠습니다. 단, 완벽한 영화라기보다는 한국 첩보 액션의 수준을 다시 한번 갱신한 영화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류승완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고심의 고심을 거듭했을 것이 느껴지는 건, 액션 신 하나하나의 설계 방식 때문입니다. 총격과 추격이 아니라 공간과 심리가 함께 움직이는 방식, 그게 이 영화의 핵심 매력이고 장르물로서 휴민트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고르고 계신다면, 저는 주저 없이 휴민트를 권하겠습니다. 다만 가볍게 즐기러 가는 영화보다는 집중해서 볼 준비를 하고 가시는 게 좋습니다. 박정민 배우를 새롭게 발견하는 경험만으로도 극장 값이 아깝지 않을 겁니다. 베를린을 먼저 보고 가신다면 감상의 깊이가 한층 더 올라갈 거라는 점도 덧붙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