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로스쿨 수석 졸업, 변호사 시험 성적 1500점 이상. 그런데 회전문 하나를 혼자 통과하지 못하는 신입 변호사.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또 천재 캐릭터 소비 아닌가?" 싶었거든요. 직접 시청해보니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1화 만에 인정해야 했습니다.
📺 공개 : 2022. 06. 29
🕙 편성 : 넷플릭스 · 16부작
🔗 장르 : 드라마
🌞 출연진 : 박은빈, 강태오, 강기영, 전배수, 주현영
자폐 스펙트럼
고래가 유영하는 법정, 우영우가 만든 판의 변화. 드라마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 Autism Spectrum Disorder)를 가진 변호사 우영우의 첫 출근날로 시작됩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란 사회적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반복적 행동 패턴을 특징으로 하는 신경발달 장애로, 증상의 범위와 정도가 사람마다 크게 다릅니다. 드라마는 이 '스펙트럼'이라는 단어를 외면하지 않고, 우영우라는 인물을 통해 그 다양성을 섬세하게 풀어냅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첫 의뢰인 사건에서 영우가 살인미수가 아닌 상해죄를 주장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선임 변호사 정명석은 집행유예를 목표로 한 교과서적인 전략을 짰는데, 영우는 민법 제1004조 상속결격 조항을 끌어들여 판을 뒤집었습니다. 상속결격이란 살인이나 살해 미수 등의 행위로 인해 상속을 받을 자격을 법적으로 박탈당하는 제도입니다. 살인미수죄가 확정되면 피고인 할머니는 남편의 연금 수급권과 부동산 상속권을 모두 잃게 된다는 사실, 주변 모두가 죄명 다툼에만 집중할 때 영우만 그 이면을 먼저 봤습니다.
개인 비즈니스를 준비하면서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계약서의 조항 하나에만 집중하다가 조항들 사이의 구조적 연결을 놓쳐서 낭패를 본 적이 있거든요. 영우가 "무게에만 초점을 맞추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핵심을 봐야 됩니다"라고 말할 때, 그건 법정 대사가 아니라 저한테 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두 번째 사건인 웨딩드레스 소송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통상 손해와 특별 손해의 구분이 이 사건의 핵심이었는데, 여기서 특별 손해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발생하지 않지만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로, 피고가 그 특별한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만 배상 책임이 인정됩니다. 영우는 여기서도 단순 위자료 산정이 아니라 332억 원짜리 토지 증여 약속이라는 특별 손해 논리를 끌어냈습니다.
아쉬운 점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에서 서사적 편의주의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영우의 '천재적 직관'이 매 사건마다 결정적 순간에 정확히 발동하는 방식은 법정물이라기보다 동화적 판타지에 가깝게 보이기도 했거든요. 치밀한 사건 구성보다 따뜻한 인물 서사를 우선하는 작품의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장르 팬으로서 아쉬운 지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영우의 사건 해결 방식을 특징짓는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반향어(에코랄리아, Echolalia)처럼 외부에서는 단점으로 보이는 특성이 오히려 법 조문을 정확히 기억하고 인용하는 능력으로 전환되는 구조
- 고래 퀴즈처럼 전제 자체를 의심하는 비선형적 사고 방식
- 마음의 흐름을 세밀하게 읽어내는 감정 독해, 특히 의뢰인의 진짜 필요를 발견하는 장면들
편견의 회전문
자폐 스펙트럼과 미디어 재현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입니다. 지인 중에 자폐 스펙트럼 아동을 키우는 엄마가 있는데, 그분이 이 드라마를 보며 했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미디어가 자폐인을 하나의 캐릭터처럼 소비할 때는 불편했는데, 이 드라마는 마음이 따뜻해진다"고요. 그 한마디가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짚어줬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자폐 스펙트럼 장애 등록 장애인 수는 2022년 기준 약 3만 5천여 명으로 집계되어 있지만, 실제 진단을 받지 않거나 경계선에 있는 사례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실제 삶에서 자폐 스펙트럼과 가까운 사람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이 드라마가 선택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재현 방식은 사회적 인식 개선에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또한 이 드라마가 돋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각본입니다. 드라마 작가인 문지원 작가는 영화 '증인'의 각본도 집필했는데, '증인'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지우(김향기)가 "엄마, 나는 자폐가 있으니까 변호사는 될 수 없겠지? 하지만 증인은 할 수 있어"라고 말했던 그 문장이, 우영우라는 인물로 이어진 셈입니다. 같은 작가가 그 씨앗을 직접 키워낸 것이라 생각하니 제가 두 작품을 연결해서 봤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물론 아쉬움도 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출생의 비밀이나 로맨스 중심의 전개가 강해지면서, 전반부에서 빛났던 법정 드라마로서의 밀도가 다소 옅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굿파트너'가 보여준 냉철한 직업적 연대나 '나의 아저씨'처럼 인물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었던 방식과 비교하면,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이 지나치게 순탄한 구간들이 있었습니다. 이 점은 솔직히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싶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박은빈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과장하거나 희화화하지 않으면서도, 우영우라는 캐릭터의 고유한 리듬과 질감을 일관되게 유지한 퍼포먼스는 이 드라마가 논란보다 감동으로 기억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배우의 연기 몰입도와 장애 재현의 윤리적 균형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달성한 사례로, 국내 드라마 역사에서도 드문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미디어에서 장애인 표현의 변화와 수용자 인식에 관한 연구들도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미디어 속 장애 재현이 비장애 중심적 시선을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비판적 시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이 드라마는 그런 기존 관행과 다른 방향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결국 이 드라마가 남긴 가장 오래된 잔상은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라는 그 첫 자기소개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그 장면이 저에게는 드라마 전체의 주제를 압축한 한 문장이었습니다.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소재를 이토록 섬세하고 따뜻하게 다룬 드라마가 또 나올 수 있을지,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시청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법률·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전문 의료기관에서 확인하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