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 볼지 고민하다가 넷플릭스 자동재생에 이끌려 새벽 두 시까지 달린 경험, 한 번쯤 있으시죠. 저는 이번에 그 대상이 엑스오, 키티 시즌3였습니다. 하이틴 로맨스라고 가볍게 봤다가, 정작 다 보고 나서는 꽤 복잡한 감정이 남더군요. 청량함과 아쉬움이 반반씩 섞인 그 묘한 여운을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성장 서사 : 서울 KISS를 무대로!
어디까지 설득력이 있었나?
엑스오, 키티는 한국 국제학교 KISS(Korea International School Seoul)를 배경으로 키티 송 코비라는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과 첫사랑의 진짜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시즌3는 특히 성장 서사(character arc), 즉 인물이 내면적으로 변화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장 서사란, 단순히 사건이 해결되는 것을 넘어 인물 자체가 달라지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내러티브 구조를 의미합니다.
제가 직접 정주행해보니, 시즌1·2에 비해 키티의 감정선이 확실히 깊어졌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엄마의 흔적을 따라 한국에 오게 된 이유부터, 가짜 관계와 진짜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까지, 이전 시즌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졌습니다. 특히 "더 많은 사람을 내 인생에 들일수록, 그들은 그냥 걸어서 나갈 수 있으니까"라는 키티의 대사는 솔직히 제가 고등학교 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던 말과 너무 비슷해서 잠깐 멈칫했습니다.
다만, 성장 서사의 설득력을 따질 때 중요한 것은 인물의 변화가 자연스러운 내적 동기에서 비롯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시즌에서 아쉬운 지점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다가 한두 마디 대화로 너무 빠르게 봉합되는 장면들이 눈에 띄었고, "저는 이게 너무 쉽게 풀리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청자 반응을 보면 이 지점에 대해 의견이 엇갈립니다. 하이틴 장르의 특성상 빠른 화해와 감정 전환이 오히려 장르적 문법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것이 긴장감을 조금 희석시켰다고 느꼈습니다.
이번 시즌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서사 장치는 타임캡슐과 러브레터라는 두 가지 모티프였습니다. 러브레터(love letter)란 감정을 직접 말로 전달하는 대신 텍스트로 남기는 서사적 장치인데, 이 시리즈에서는 그것이 인물 간의 관계를 뒤흔드는 핵심 트리거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연애편지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전달되면서 관계의 지형도가 바뀌는 구조는 꽤 잘 작동했고, 제 경험상 이런 서사 장치가 로맨스 드라마에서 효과적으로 쓰일 때는 시청자가 인물에 훨씬 깊이 이입하게 됩니다.
이번 시즌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핵심 서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키티의 정체성 탐색이 엄마의 흔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체화됨
- 가짜 관계에서 진짜 감정으로 이행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적 구조가 여러 인물 관계에 중첩됨
- 커밍아웃 서사가 단발성 에피소드가 아닌 시즌 전체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음
- 타임캡슐, 러브레터 등 레트로 감성의 서사 장치가 K-컬처 요소와 결합되어 있음
하이틴 로맨스 장르의 서사 공식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이 장르는 인물의 취약성 노출과 공감 유발을 통해 시청자의 감정적 몰입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진화해왔습니다(출처: BFI(영국영화진흥원)). 엑스오, 키티는 그 공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K-컬처라는 특수한 배경을 접목시킨 점에서 차별화를 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K컬처
서울이라는 배경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이것도 시청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는 부분입니다. K-컬처를 로컬 정서에 가깝게 재현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외국인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의 이국적 이미지를 소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두 시각이 모두 일정 부분 맞다고 생각합니다.
추석, 부채춤, 한국어 어휘 등 구체적인 문화 요소들이 에피소드 안에 배치된 방식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정(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장면은, 한국어로는 단순히 번역하기 어려운 감정의 결을 외국 시청자에게 전달하려는 시도가 느껴져서 꽤 좋았습니다. 여기서 "정"이란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애착과 유대감을 뜻하는 한국 고유의 정서 개념으로, 단순한 사랑이나 우정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가집니다. 이 개념이 드라마에서 인물 관계의 변화를 설명하는 맥락으로 쓰였을 때, 저는 그것이 꽤 솔직한 선택이었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K-컬처 재현이 영상미와 표면적 소품에 집중된 경우에는 문화 소비주의(cultural consumerism)적 시선으로 읽힐 여지가 있습니다. 문화 소비주의란 특정 문화를 그 맥락과 깊이보다는 시각적·소비적 요소로 접근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몇몇 장면에서 서울의 야경과 트렌디한 소품들이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 부분은 제 경험상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었습니다.
캐릭터 서사
캐릭터 서사 면에서도 비슷한 불균형이 보였습니다. 키티, 유리, 대, 민호 등 주요 인물들의 관계는 생동감 있게 전개되었지만, 몇몇 조연들은 충분한 서사 없이 도구적으로 소비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캐릭터 서사(character narrative)란 인물이 갖는 독립적인 동기와 변화의 축을 의미하는데, 조연에게도 이것이 어느 정도 주어져야 이야기 전체의 밀도가 올라갑니다. 기묘한 이야기처럼 조연 한 명 한 명의 서사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수준을 기대했다면 분명 아쉬움이 남을 수 있는 구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시리즈를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겠습니다. 장르 특유의 설렘과 청량감, 그리고 "내가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자꾸 떠올리게 만드는 공감의 힘입니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에서 하이틴 장르의 소비 패턴을 분석한 넷플릭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 장르는 전 연령대에 걸쳐 회귀적 시청(binge-watching) 비율이 가장 높은 카테고리 중 하나입니다(출처: Netflix Media Center). 그 이유를 저는 이번 정주행으로 다시 한번 이해했습니다.
결국 엑스오, 키티 시즌3는 하이틴 로맨스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충실하게 전달한 시즌입니다. 서사의 치밀함보다는 감정의 온도를 따라가는 장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시즌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작이었습니다. 다음 시즌이 나온다면, 조연들의 캐릭터 서사가 좀 더 촘촘하게 설계되고, 갈등 해소 방식이 조금 더 현실적인 속도감을 갖기를 기대해봅니다. 성장 서사가 진짜 힘을 발휘하려면, 인물이 변화하는 과정이 시청자에게도 설득력 있게 보여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