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기대 반 의심 반이었습니다. 제목만 보면 누가 봐도 흔한 부동산 성공기처럼 읽히니까요.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자마자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건 건물주의 '성공담'이 아니라, 건물주라는 꿈이 한 가정을 어떻게 파국으로 몰아넣는지를 냉소적으로 해부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고금리 시대 영끌 투자의 비극을 다룬 2025년 가장 화제작, 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입니다.
생계형 서스펜스
프롤로그부터 심상치 않았다. 이 드라마의 세계관
혹시 드라마 첫 장면이 건물 폭파라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오프닝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서울의 재개발 예정지 세정로 4구역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이지만, 오래된 세입자에게는 삶의 터전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드라마는 바로 이 충돌 지점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리얼 캐피털의 요나(심은경)는 철거 직전의 건물 지하에 정창수 사장을 감금하고 서류에 인감 도장을 강제로 찍게 만듭니다. 여기서 인감 도장이란 부동산 거래나 법률 행위에서 본인 의사 확인의 최종 수단으로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물적 증거입니다. 공포에 질린 채로 도장이 찍히자마자 건물은 폭파되고, 정창수는 잔해 아래 그대로 묻혀버립니다.
이 장면이 단순한 자극을 위한 연출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건 명백한 복선(伏線), 즉 이후 전개될 사건의 핵심 구조를 미리 예고하는 서사적 장치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건물주가 되는 방법은 결코 합법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첫 장면부터 못 박아두는 거죠.
캐스팅
기수종이라는 인물, 얼마나 공감이 되십니까?
주인공 기수종(하정우)을 처음 봤을 때 저는 묘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웃기면서도 너무 현실적이었거든요.
수종은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활성의 꼬임에 넘어가 세정로의 꼬마 빌딩인 '세윤 빌딩'을 20억에 매입합니다. 자기 자본은 고작 2억, 나머지 18억은 1금융권부터 사채까지 긁어모은 이른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이었습니다. 여기서 영끌이란 금리 상승기에 가장 위험한 방식의 레버리지 투자로, 대출 이자가 임대 수익을 초과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현금 흐름 악화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2022년부터 기준금리를 0.5%에서 3.5%까지 약 3%p 인상했던 기간, 비슷한 구조로 투자에 나섰던 많은 소규모 건물주들이 이자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매 시장에 매물을 내놓았습니다(출처: 한국은행). 수종의 이야기가 그저 드라마 속 설정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낮에는 건물주 소리를 들으며 임대인으로 행세하지만, 밤에는 택배, 대리운전, 배관 청소까지 뛰는 수종의 이중생활. 아내의 생일 선물로 박스도 없는 중고 명품 지갑을 건네는 장면은 그 상대적 박탈감을 단 하나의 컷으로 압축해냅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웃음이 나오다가 멈췄습니다. 너무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1회에서 드라마의 방향을 결정짓는 핵심 사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리얼 캐피털이 수종의 대출 채권을 넘겨받으며 압박을 시작
- 요나가 수종에게 20억 건물을 14억에 팔라는 굴욕적 제안을 강요
- 수종의 처남이자 형사 김균(김남길 분)이 리얼 캐피털의 비리를 조사하다 덤프트럭에 치여 살해당함
- 활성이 장모의 돈을 탈취하려 가짜 납치극을 제안하고, 수종이 공모에 가담하며 1회 종료
역대급 캐스팅, 진짜 비하인드는 따로 있었다
이 드라마가 방영 전부터 업계에서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단순히 출연진 이름값 때문만이 아닙니다. 각 배우가 캐릭터에 접근한 방식이 달랐습니다.
하정우 배우는 2007년 드라마 '히트' 이후 무려 19년 만에 안방극장으로 복귀했습니다. 수많은 대작 드라마 제안을 거절해온 그가 이 대본은 단 3회분만 읽고 즉시 수락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기수종이라는 인물이 가진 '생활 밀착형 비굴함'이 그를 끌어들인 핵심이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화면에서 확인한 것은, 변기를 뚫고 배달을 뛰는 장면들에서 배우가 직접 그 생활에 녹아든 듯한 능청스러움이었습니다. 그 디테일은 연기가 아니라 체화처럼 보였습니다.
심은경 배우는 6년 만에 한국 드라마에 복귀하며 요나 역을 맡았습니다. 임필성 감독이 원한 것은 전형적인 악역이 아니라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천재'였다고 합니다. 현장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심은경 배우가 세트장에 등장하면 주변 온도가 내려가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저 역시 요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세가 긴장되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김남길 배우의 합류. 이건 제 예상 밖이었습니다. 대본도 보기 전에 하정우 배우의 전화 한 통에 수락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막상 대본을 받고 나니 분량이 주연급이라 당사자도 당황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집니다. 코인노래방에서 달팽이를 함께 부르는 수종과 김균의 장면은 촬영 전날 두 배우가 실제로 술자리를 가지며 처남과 매형 사이의 유대감을 연구한 결과물이라고 하니, 그 장면의 온기가 어디서 왔는지 납득이 됩니다.
서사 비판
공감이 무너지는 순간, 이 드라마의 한계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불편한 지점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 불편함을 그냥 넘기기가 어렵더라구요.
드라마는 영끌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재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중반 이후부터 서사가 가짜 납치극이라는 극단적인 범죄 스릴러 구조로 급격히 전환됩니다. 여기서 '서사 개연성(narrative plausibility)'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서사 개연성이란 극 중 인물의 선택이 현실 논리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납득되는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것이 무너지는 순간 시청자는 감정 이입 대신 관찰자로 물러서게 됩니다.
블랙코미디로 시작한 작품이 결국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반전에 급급해진다는 일부 시청자의 지적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초반에 쌓아 올린 현실적 공감대가 중반부 이후 자극의 반복으로 소모되면서, 인물에 정을 붙이기보다 피로감이 먼저 쌓이는 구간이 존재했습니다. '모든 캐릭터가 악인 아니면 바보'라는 비판이 일부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것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됩니다.
연출 면에서도 영화적 미장센은 분명 탁월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의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 구도, 배우의 동선, 소품 배치 등을 총체적으로 설계하는 영화 언어입니다. 임필성 감독 특유의 이 연출 방식 덕분에 TV 드라마임에도 스크린을 보는 듯한 밀도가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2부작이라는 분량을 채우기 위해 불필요한 정적 장면이 늘어나면서 긴장감이 희석되는 구간도 있었습니다. 이 점은 제가 직접 보면서 확인한 아쉬움입니다.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 작품 후반부 서사의 완결성이 떨어지는 경향은 종종 지적되어 왔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드라마 산업 보고서에서도 편성 압박으로 인한 시나리오 수정이 서사 밀도 저하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이 드라마가 그 함정을 피해가는지가 후반부의 핵심 관전 포인트일 것입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은 분명 잘 만든 드라마입니다. 다만 얼마나 '잘 마무리된 드라마'가 될지는 지금도 지켜보는 중입니다. 영끌의 비극을 다루는 이 이야기가 자극의 나열로 끝나지 않으려면, 초반의 현실 공감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서사적 끈기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1회 첫 장면만이라도 한번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시청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특정 작품이나 금융 상품에 대한 전문적인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